[이데일리 오토in] 카가이 이준호 기자= 우리나라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를 대표하는 제네시스에서 첫 SUV GV80을 내놨다. 현대차 및 제네시스 디자인센터장 이상엽 전무는 럭셔리 SUV라 언급했다. 브랜드 가치를 형용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프리미엄, 럭셔리, 하이엔드, 얼티메이트, 프레스티지 등등. 그 중 프리미엄과 럭셔리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다.
국제영어대학원 신학사전에 따르면 “프리미엄(Premium)은 고품질을 추구하지만 저렴한 가격대의 브랜드”라 해석한다. 프리미엄은 럭셔리보단 아래 등급을 지칭할 때 쓰는 게 맞다는 얘기다. 요즘엔 현대기아, 르노, 쉐보레, 쌍용과 같은 대중 브랜드도 하나 같이 신차를 내놓으면서 프리미엄을 외친다. 그만큼 프리미엄 의미가 대중화됐다.
현대차는 그랜저, 팰리세이드와 같은 플래그십 신차를 내놓으면서 프리미엄을 붙여버렸다. 한 등급 위인 GV80은 자연스럽게 럭셔리가 됐다. 가죽도 더 쓰고, 다양한 컬러도 선택할 수 있다. 엠블럼도 고급 진다. 그래서 가격까지 비싸다. 제네시스는 프리미엄 브랜드인데 동급의 처지가 못마땅할 수도 있다. 럭셔리는 호화스럽고 사치스럽다. 여기에 소유욕을 불태우는 +α의 당위성도 있어야 한다. 그 당위성엔 유구한 헤리티지도 있지만, 현재진행형인 가치 추구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GV80은 럭셔리에 어울릴까?
프로파일(Profile)로 보는 디자인 랭귀지프로파일은 옆모습이란 의미다. 흔히들 비례, 비례하는데 좀 더 미시적 관점에서 프로파일을 보자. GV80 프로파일 특징은 후륜구동 기반의 롱 액슬 투 도어(Axle to Door : 앞 바퀴 축에서 앞 문까지 거리)도 있지만, 더 시선을 사로잡는 건 뒤로 갈수록 처지는 라인이다.
처진 루프, 처진 캐릭터 라인이 의미하는 건 클래식 스포츠성이다. 4도어 쿠페란 세그먼트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아우디 A7, 메르세데스 CLS 등의 디자인은 톱다운 방식으로 리어가 처져 보였다. 사람에게 처진다는 것은 부정적일 수 있지만 자동차 디자인에서 처짐은 우아함으로 전이된다.
제네시스는 이를 두고 '어슬레틱 엘레강스(Athletic Elegance)'라고 한다. 제네시스의 디자인 랭귀지이다. 어슬레틱이란 단어에서도 알겠지만, 우아한 곡선을 가지고 처진다는 건 스포츠성과도 연관이 꽤 깊다. 1930년대부터 50~60년대까지 풍부한 볼륨의 곡선을 자랑한 클래식 스포츠카 프로파일은 대체적으로 이랬다. 어슬레틱 엘레강스란 디자인 랭귀지를 처음으로 정립한 에센티아 콘셉트카가 이를 환기시킨다. 슈퍼카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던 샤샤가 코닉세그로 떠나기 전 짧은 제네시스 근무 기간에 남기고 간 유작이다. GV80은 에센티아 콘셉트의 요소가 다수 인용됐다.
즉, GV80의 처짐 스타일은 쿠페형 SUV스럽다. 그러나 쿠페형 SUV는 아니다. 패스트 백(fast-back : 지붕에서 트렁크로 내려오는 라인이 가파르게 이어진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해치백(hatch-back : 트렁크가 실내와 통합돼 데크가 없는 2박스 스타일)이다. 쿠페형이 아님에도 쿠페 스타일을 채용한 매력이 GV80의 대표 요소다. 다만, 이런 포지셔닝이 럭셔리라 불리기 위해서는 어슬레틱 엘레강스란 디자인 랭귀지가 오랫동안 지속돼야 한다. 이것이 럭셔리의 요소인 유구한 헤리티지다.
어슬레틱 엘레강스란 디자인 랭귀지를 SUV에 적용한 디자인은 신선하다. 신선함은 어색함이란 편견도 내포한다. 럭셔리를 구매하는 부류가 어정쩡한 프로파일을 선택할 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포르쉐 카이엔을 보자. 아예 쿠페형 SUV 세그먼트가 따로 있다. 독일 프리미엄 3사도 마찬가지다. 실용성과 스포츠성은 서로 상반된다. 실용성을 챙기려면 실용성만 확실히 챙기고, 스포츠성을 살리려면 실용성은 아예 포기함이 럭셔리의 유럽식 판단 기준이다.
GV80의 처진 루프로 인해 실용성을 챙긴 듯한 3열 좌석은 불편하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을 럭셔리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덴티티(Identity)럭셔리에서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은 상당히 중요하다. 남과는 다른 나만의 독창성은 럭셔리의 생명이다. 아디다스와 나이키, 코카콜라의 인용은 좀 유치했지만(럭셔리를 꾸미는데 어울리지 않는다), 쿼드 램프는 충분히 독창적이다. 전구의 기술적 발전은 LED의 대중화를 일궈냈다. 아주 조그마한 모듈만으로도 풍부한 광원을 확보할 수 있다. 램프류가 커질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GV80의 쿼드 램프는 이런 이점을 최대한 살린 결과물이다.
반면, 오목한 트렁크 패널, 치켜 올라간 리어 쿼터 글라스 등은 익히 싼타페 디자인에서 보던 특징이다. 라디에이터 그릴도 콘셉트 디자인에 비해 단순해졌다. 각지고 도드라졌다. 커서 눈에 잘 띄고,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견줘도 꿀리지 않는 디자인이 럭셔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아닐 건데, 아쉬운 면이다.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콘셉트와 프로토타입의 이질화는 럭셔리답지 않다. 콘셉트는 분명 세밀한 공예적 디테일이 강점이었다. 양산을 거치며 표현방식이 대담해졌다. 형태를 그대로 가져오려 노력한 반면, 표현 방식은 달라졌다. 폰트 디자인으로 비유하자면, 레귤러 세리프 체에서 볼드 산 세리프 체로 바뀐 셈이다. 큰 변화이다.
브리티시 룩(British-look)지 매트릭스(G-Matrix)는 벤틀리 매트릭스라는 격자무늬 마름모 꼴에서 따왔다. 물론 벤틀리 매트릭스와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루크 동커볼케와 이상엽이 벤틀리에서 근무하다 이직한 이상, 영국적 색채는 최대한 지우려는 노력은 해야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첫 럭셔리 SUV라면 말이다.
새로운 컬러도 이슈다. 이상엽 전무는 “그린 컬러로 인테리어까지 선택해 운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컬러 이름은 카디프 그린이다. 카디프는 영국의 항구도시다. 영국 자동차 메이커들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이란 컬러를 꼭 하나씩 구비한다. 말 그대로 레이스 때, 영국을 대표하는 컬러로 그린을 썼기 때문이다. 제네시스 GV80이 그린 컬러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외에도 다른 컬러에는 멜버른(호주 도시), 브런즈윅(독일 또는 미국 도시), 우유니(볼리비아의 소금사막), 마테호른(스위스 알프스산맥) 같은 외국 지명과 관광 명소가 두루 등장한다. 한국의 럭셔리답지 않게 유치하다. 멜버른 그레이는 멜버른이란 도시가 회색빛이어서 그런건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차라리 꽃담황토색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지 매트릭스는 인테리어를 수식하는데도 두루 쓰였다. 휠 버튼, 에어 벤트 테두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매끈한 형태보다 더 장식적이라 고급스럽다. 신경쓰긴 했지만, 럭셔리한 디테일이라기엔 분명 아쉽다.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센터 터널 무릎 닿는 곳에 누빔 가죽 패드를 덧댔다고 럭셔리가 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럭셔리가 되기 위해선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을 덧댈 수 있어야 한다.
여백의 미 인테리어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 BTS의 세계적 성공을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 Glocal은 Global + Local의 조합어다. 가장 지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제네시스 디자인팀도 이를 자각한 듯 보인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테마를 들고 나왔다. 바로 여백의 미다.
여백의 미는 그 옛날 조선시대 수묵화 화법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비워져 있지만, 채워진 거와 마찬가지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란 뜻이다. 이를 영어로 옮기면 Beauty of Blank Space가 된다. 제네시스는 여백의 미를 White Space로 바꿔 말한다. 의미 또한 미술적 화풍에서 느끼는 여백의 미 보다는 건축에서 느끼는 여백의 미로 바꿨다. 여기에는 문제가 많다.
첫째, 건축에서 말하는 공간적 여백을 디자인에 쓰고 싶었다면 Blank가 맞다. White space도 여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인쇄에서 쓰는 '인쇄 시 필요한 마지노선'이란 의미다.
둘째,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 여백의 미가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전통 건축에서 여백의 미는 마당뿐이다. 마당 있는 건축물이 우리나라 밖에 없는 건 아니다.
셋째, 여백의 미를 회화로 가져가도 마찬가지다. 중국, 일본의 회화에서도 여백의 미는 당연히 존재한다.
어쨌든, 여백의 미가 구현된 GV80 인테리어로 들어가 보자. 여백의 미가 구현된 요소로 물리적 버튼의 단순화와 송풍구의 낮은(3cm) 높이를 들었다. 필자가 볼 땐 이것보다 아주 밋밋하고 광활한 대시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리 버튼의 단순화는 한국적인 여백의 미를 부여한 제네시스 만의 특징이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은 터치패널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나마 좁은 송풍구를 독창적이라 할 수 있으나, 이미 쏘나타, 그랜저에서 시도한 것 아닌가?
제네시스가 인테리어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는, 건축에서 마당이 주는 역할을 자동차 인테리어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그냥 여백의 미니깐, 비우면 아름답고,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는 1차원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디터 람스(Dieter Rams 독일 산업 디자이너)가 말하는 'Less but Better'를 들이대는 게 더 어울린다.
한국 디자인으로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 없이는 글로컬이 될 수 없다. 제네시스 GV80 디자인은 충분히 글로벌한 감각을 지녔다. 이런 대중적인 매력은 충분히 구매력을 자극한다. 다만, 프리미엄이라고 놓고 볼 때 그렇다.
제네시스를 럭셔리로 놓고 보자면 완성도가 한없이 떨어진다. 럭셔리는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예뻐, 멋있어로 끝나서는 될 수 없다.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것은 실용성과 스포츠성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지도 않고, 하위 브랜드에서 하던걸 가져오지도 않는다. 옵션 이름 하나 붙이는 거에도 심혈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어쭙잖은 미학으로 수식하지도 않는다.
제네시스의 럭셔리는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건축의 여백의 미인 마당은 정중지와(井中之蛙)인 셈이다. 글로컬이 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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