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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2016.06.07 15:06 | 박낙호 기자 car@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이데일리 오토in 박낙호 기자] 19세기 말 독자 생존에 나선 푸조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며 꾸준히 협력해왔던 다임러와의 관계는 로열티의 부담과 브랜드 경쟁력 강화를 위해 1896년에 마무리 됐다. 물론 이 배경에는 푸조가 독자 개발에 성공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타입 15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르망 푸조는 타입 15을 앞세워 독자 브랜드로 나서기 위해 오딘코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새롭게 설립하며 본격적인 자동차 브랜드로서 그 정체성을 쌓기 시작한다.

다행히 독자 브랜드로도 푸조의 경쟁력을 인정 받아 1896년부터 1899년까지 꾸준한 판매 성장이 이어졌다. 게다가 1899년에는 니스-카스텔란-니스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기술력 마저 인정 받으며 시장의 호평을 받게 된다. 분위기를 탄 듯 푸조는 대형 모델이 일색이던 라인업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는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1901년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가 디자인한 소형 모델 타입 BP1, 속칭 베베(Bebe)를 파리 살롱에서 공개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여기에 엔진 개발자인 토니 후버(Tony Huber)를 영입했고, 토니 후버는 푸조 브랜드 최초의 6기통 엔진을 개발했다. 푸조는 베베와 6기통 엔진을 앞세워 20세기 초반의 성장세를 이어갔고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새로운 발전의 발판이 된 제1차 세계대전

1907년 아르망 푸조가 사망하자 푸조 자동차는 1910년 다시 푸조형제회사와 합쳐졌다. 일종의 기업 개편을 겪으며 로베르 푸조가 대표로 나서게 됐다. 결집을 통해 푸조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연간 자동차 생산량이 1만대에 이르고 자전거는 8만 대에 이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모터스포츠에서도 푸조는 지치지 않았다. 푸조는 모터스포츠를 통해 볼 베어링을 시작으로 크랭크 축과 캠 샤프트, 드라이 섬프 등을 대대적인 개선과 신기술 개발이라는 경험을 얻었다. 특히 1915년의 프랑스 그랑프리와 밴더빌트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푸조의 모터스포츠 패권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하지만 전쟁은 생산 기업의 형태와 그 운영 방식을 뒤흔들게 되는데 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조는 전쟁 기간 동안 탱크를 비롯한 기갑 전력의 생산을 담당했고, 이를 통해 자본의 확보는 물론 대량 생산의 경험을 쌓게 됐다 이를 통해 푸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산 능력을 대폭 확장시킬 수 있었다.

1926년 대에 접어들자 푸조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1920년 대 초반에 데뷔한 타입 153과 3세대 베베인 ‘콰드레빌레르(La Quadrilette)의 성공을 발판으로 푸조 자동차 사업부의 주도적인 경영과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푸조 자동차와 모터사이크 사업을 분리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푸조의 타개책, 그리고 역사의 시작 201

경제 공황은 전세계를 얼어 붙게 만들었고, 모든 브랜드들이 힘겨운 시기를 보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푸조는 프랑스 시장에서 가장 저렴하고, 푸조 브랜드의 새로운 네이밍을 상징하며 경제 공황의 위기 속에서 브랜드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든 ‘푸조 201’을 공개한다. 푸조 201은 매년 판매량이 줄어드는 푸조가 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에 ‘세그먼트’ + 0 + ‘세대’로 구성되는 푸조의 네이밍 방식이 적용된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었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201의 성공으로 푸조는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모델을 투입하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후 1930년 대에는 202와 함께 302가 등장하며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대형 모델인 601 C 이클립스 또한 데뷔했다. 한편 1934년에는 브렌드 최초의 하드톱 방식의 컨버터블 모델인 ‘402 BL 이클립스 데캡포터블(Eclipse Decapotable)이 시장에 데뷔했다. 푸조 브랜드의 역사적인 모델인 402 BL 이클립스 데캡포터블은 나치의 점령을 당한 이후인 1941년까지 꾸준히 판매되며 많은 사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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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 절망에서 재기하다

제 2차 세계대전은 푸조에게 제 1차 세계대전 보다 더 많은 상처를 안겼다. 1940년 나치의 지배하에 놓인 푸조와 르노는 군수 생산을 강요 받았고, 마지못해 수용한 르노와 달리 푸조는 끝까지 거부했고 장 피에르 푸조 3세는 공장을 폭파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서 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나치는 자연스럽게 장 피에르 푸조 3세를 추격했고, 그를 붙잡아 총살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독일의 자동차 엔지니어 포르쉐 박사가 개입해 장 피에르 푸조 3세는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푸조 자동차의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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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푸조는 202를 다시 생산하며 재기에 나섰고, 1947년 코일 스프링과 랙 앤 피니언 스티어링, 유압식 브레이크를 적용한 푸조 203를 공개하며 회복세를 이어간다. 그리고 종전 5년 후인 1953년에는 1.5L 엔진을 얹은 403을 공개했고, 재기에 성공했음을 선포했다.

재기에 성공한 푸조는 1950년 대부터 미국, 호주 등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1960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404가 미국 진출의 주요 모델로 자리 잡았고, 이후 404은 아프리카의 사파리 랠리에 출전(1963~1968년)에 출전해 우수한 완성도와 강력한 내구성을 인정 받았다. 이후 혁신적인 디자인의 504을 공개하며 아프리카, 남미 시장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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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의 탄생을 알린 1970년대

재기 이후 꾸준한 성공 가도를 달린 푸조는 1970년 대 중반부터 시트로엥의 지분을 흡수하며 기업 인수를 추진한다. 1919년 설립된 시트로엥은 당시 반켈 엔진 라이선스 비용 지불 및 반켈 엔진 상용화 등으로 인해 재정 상황에 문제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푸조는 약 3년에 걸쳐 시트로엥 인수를 진행했고 인수 후에는 크라이슬러의 유럽 부분까지 인수한다. 이에 PSA 푸조 시트로엥(PSA Peugeot Citroen)는 출범과 함께 프랑스 경제의 중요한 축이 된다. 또한 ‘탈보’ 브랜드를 부활시키는 광폭 행보에 나섰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터줏대감 피아트 그룹과의 합작회사인 세벨을 설립하며 브랜드의 폭발적인 성장의 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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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시대의 방점을 찍은 푸조

1970년 대 말 ‘푸조의 빅딜’을 통해 푸조와 PSA 그룹은 단 번에 유럽을 호령하는 거대 브랜드 및 그룹으로 탈 바꿈 했고 푸조의 영향력을 거대했다. 하지만 급하게 먹은 만큼 체증이 올라왔다. 70~80년 대를 휩쓴 오일 쇼크는 시장 경제를 경직시켰고 푸조는 역시 인수 및 공동 설립을 위해 진행된 지출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카드가 푸조의 손에 쥐어졌다. 푸조는 위기를 205이라는 작은 거인으로 돌파했고, 나아가 309(탈보 호라이즌의 리뱃징 모델)과 405 등을 연이어 연착륙시키며 브랜드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게다가 205 까브리올레를 통해 ‘포드 주의’를 탈피하는 ‘모델의 다양화’의 시작을 알린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1985년에는 중국시장에 도전장을 던진다. 둥펑자동차와 함께 ‘둥펑 푸조 자동차’를 설립하고 404과 405 등을 주력으로 생산했다. 상용차 중심의 둥펑자동차는 푸조와의 합작으로 승용 시장에서의 입지를 넓히게 됐다. 둥펑 푸조는 이후 ‘둥펑 PSA’로 이름을 바꿔 시트로엥의 모델까지 함께 생산하게 된다.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1990년 대 푸조는 소형 모델인 106을 시작해 205와 306 그리고 중형 모델인 405, 406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운영했고 605를 통해 대형 시장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205에서 시작된 소형 라인업과 대형 라인업의 온도차이는 확연했다. 소형 라인업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익을 챙겼지만 중형 이상에서는 적자의 늪을 헤매기 시작한다.

푸조 브랜드 히스토리 (2) - 푸조, 격동의 한 세기를 보내다


모터스포츠 활동의 폭을 넓히다

이와 함께 WRC 무대에서 1985년, 1986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1987년 다카르 랠리에서 출전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다. 1987년과 1988년에는 205 터보 16(205 T16 Grand Raid), 1989년과 1990년에는 405 터보16(405 T16 Grand Raid) 모델로 대회에 참가해 4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모터스포츠 무대에서의 존재감을 뽐냈다.

1990년 대에는 월드 스포츠 카 챔피언십으로 대회를 옮겨 맹활약을 하고 내구 레이스에도 905 등을 출격시켰다. 또한 F1에도 엔진을 제공하는 등 더욱 넓은 범위의 모터스포츠 활동을 펼치게 된다. 푸조의 엔진은 F1 무대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엔진 공급 업체로 첫해였던 1994년 푸조의 엔진을 장착한 맥라렌의 성적은 참담해 푸조 모터스포츠 역사의 어두운 이면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