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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2016.06.27 07:38 | 박낙호 기자 car@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이데일리 오토in 박낙호 기자] 밀라노에 의한, 밀라노를 위한 그리고 밀라노의 꿈을 담아 알파 로메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이탈리아 자동차는 고집불통의 장인을 떠올린다. 소통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불통이 왠 말일지 모르겠지만, ‘대화를 하는 불통’은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 시대의 흐름과 유행에 속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어쩌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말을 바꾸며 모르쇠와 불통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시대에 맞춰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분명 격이 다른 불통일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부침과 고난으로 고생을 한 자동차 브랜드가 바로 알파 로메오다. 이탈리아와 밀라노를 기반으로 성장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난을 받고 경영 악화로 힘든 길을 걸어왔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한다. 지난 100년 동안 브랜드를 힘들게 했지만 그 속에서도 브랜드를 지켜온 그 전통과 고집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밀라노에 의한 A.L.F.A가 이어진 알파 로메오는 지금까지 밀라노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밀라노 그리고 알파 로메오의 탄생과 배경

1906년 프랑스의 자동차 생산 기업 알렉산더 다라크(Alexandre Darracq)가 이탈리아의 카발리에 우고 스텔라(Cavaliere Ugo Stella)와 몇몇의 투자가들의 도움을 받아 SAID(Societ Anonima Italiana Darracq)를 설립한다. 초기 나폴리(Napoli)에 자리를 잡았으나 1906년 말, 밀라노(Milano) 인근의 포르텔로(Portello)에 6,700 m² 부지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며 밀라노로 이전을 한다. 그러나 자체 생산과 차량 개발 능력이 없었던 SAID는 이내 경영이 악화되었다.



파산이 가까워진 SAID는 이내 카발리에 우고 스텔라의 밀라노 은행의 소유가 되었고, 카발리에 우고 스텔라는 다라크와의 제휴는 그대로 유지한 채 안토니오 산토니(Antonio Santoni.)등을 비롯한 다른 이탈리아의 투자자들을 모아 SAID의 경영권을 인수한다. 이를 통해 SAID는 사명을 Anonima Lombarda Fabbrica Automobili.으로 바꾸고 이를 줄여 A.L.F.A라고 명명했다. SAID의 생산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경영 시스템을 개선, 계승한 것이다. 사명에 등장하는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와 그 인근을 품고 있는 지방을 의미한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A.L.F.A의 최초 모델 24HP는 이름과 달리 24마력의 출력을 가진 차량이 아니었다.



설립 초기 기본적인 자동차 생산 기술이 부족했던 A.L.F.A는 다라크와의 전략적인 제휴 관계를 유지했으나, 단순히 수입, 혹은 라이선스 생산 방식으로는 A.L.F.A의 생존과 성장에 불필요하다는 거슬 깨닺고 A.L.F.A 브랜드만의 차량이 있어야 한다는 내부 결정에 따라 피아트(FIAT)의 주세페 메로시(Giuseppe Merosi)를 영입한다. 새롭게 A.L.F.A의 멤버가 되어 차량 개발을 진두지휘한 메로시에 의해 1910년 A.L.F.A의 첫 양산 차량이 등장했다.



A.L.F.A의 첫 시판 모델인 24HP는 이름과 다르게 42마력급 차량으로 4기통 4.1L 급 엔진을 장착했다. 마차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디자인을 가진 24HP는 3,200mm의 매우 긴 휠 베이스를 가지고 있으며 4단 수동 변속기를 장착, 최고 시속 100km를 기록했다. 또한 24HP와 함께 이외에도 4기통 2.4L 엔진을 장착해 22마력의 힘을 보여준 12HP 또한 함께 생산했다. 이후 1912년 12HP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15HP를 출시, 최대 24마력의 출력을 보여줬다. 다라크, SDID부터 이어오던 HP라는 모델 명은 이후 20년대까지 이어진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밀라노를 상징하는 두 문양이 만나 A.L.F.A의 상징이 되었다.



알파 로메오 엠블럼의 탄생과 경쟁자

알파로메오의 엠블럼은 A.L.F.A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데 주세페 메로시와 엔지니어 로마나 카페네오(Romana Cattaneo)는 최초의 양산 차량 24HP에 부착할 엠블럼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두가지 문양을 푸른 원 안에 담아내는데, 이 때부터 ALFA라는 글이 새겨진 푸른 색 원형 안에 좌측에는 흰 바탕에 십자가가 자리를 잡고, 우측에는 왕관을 쓴 뱀이 사람을 물고 있는 모습이 정착되었다. 엠블럼에 자리를 잡은 이 두 가지 문양은 모두 밀라노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우선 좌측은 과거 십자군 전쟁 당시 밀라노 출신의 기사단들의 활약을 기리고 있다. 우측 또한 밀라노와 관련이 큰데, 십자군 전쟁 당시 최초의 비스콘티가 이슬람 병사의 방패에 있던 뱀을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했는데, 비스콘티 가문은 이후 밀라노를 상징하는 가문이 되었고, 이후 A.L.F.A의 엠블럼에도 적용됐다.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 그리고 롬바르디아의 자동차 메이커를 품은 A.L.F.A는 탄생부터 경쟁자로 생각한 브랜드가 있었는데, 이는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지역의 명사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창설된 이탈리아 토리노 자동차가 바로 A.L.F.A 탄생의 배경에 있었다. 자바이어 가문라는 가문은 전통적으로 토리노와 피아몬테 지방에서 뿌리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밀라노와 롬바르디아, 그리고 비스콘티 가문과 경쟁 체제를 갖췄다. 그들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탈리아 토리노 자동차가 밀라노의 권력자들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정식 명칭은 바로 ‘Fabbrica Italiana Autombili Tnorion’인데, 이 긴 사명을 줄이면 바로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 알파 로메오를 인수하는 FIAT가 된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설립 이듬 해 A.L.F.A는 모터스포츠에 참전, 자신들의 사업 방향을 확정한다.



1911년, A.L.F.A의 방향성에 대한 본질을 깨닫다.

24HP와 12HP의 양산에 돌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알파 로메오는 사측의 사업 전략을 확실히 한다. 바로 모터스포츠에 대한 참전을 희망하고, 그에 맞춰 준비한 것이다. 그들의 사업 전략에 맞춰 착실히 준비된 모터스포츠 참전은 1911년 실행에 옮겨졌는데, 1906년 설립되어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의 험로를 달리는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레이스에 참전했다. 결과를 떠나 알파 로메오의 모터스포츠 참전은 브랜드의 방향성과 가치에 대해 큰 반환점이 되었고, 이후 알파 로메오는 ‘달리기’에 집중하는 브랜드 전략을 수립한다.



니콜라 로메오의 A.L.F.A 인수,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14년, A.L.F.A는 24HP를 능가하는, 그리고 모터스포츠에 적합한 차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DOHC 엔진 등을 개발했다. 이와함께 1915년, 니콜라 로메오가 ALFA를 인수한다. 나폴리 근교에서 태어난 니콜라 로메오는 1900년 기술학교를 졸업 후 10여년 간의 유학 생활을 통해 많은 경험과 견문, 지식을 쌓고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Ing Nicola Romeo를 설립하고 광업 기계류와 장비들을 대거 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A.L.F.A를 인수한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가운데 콧수염이 있고 모자를 쓰고 있는 니콜라 로메오



니콜라 로메오가 A.L.F.A를 인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4년 4개월동안 펼쳐진 제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세력권의 대립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천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야기했다. 광물 자원의 운송을 위한 철도 부설 등의 문제로 많은 갈등이 생겼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호엔베르크 소피아(Hohenberg Sophie) 황태자비가 세르비아의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게 암살을 당하는 사라예보 사건 등이 발발하고, 오스트리아는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아 전쟁은 이내 유럽 각지를 흔들었다.



전생의 시작과 함께 A.L.F.A는 다른 이탈리아의 자동차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잠시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생산 라인의 대부분을 군수 물품 생산에 집중한다. A.L.F.A는 이탈리아 군과 유럽의 연합국들이 사용할 군수 및 항공기 엔진과 기타 부품을 생산했는데, 이는 훗날 자동차 기술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 4년 4개월 간의 기나긴 전쟁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탈리아 역시 승전국이 되었고, 니콜라 로메오는 많은 수익을 거뒀다. 전쟁으로 인한 수익을 통해 A.L.F.A의 생산 규모를 확대하고, 자신의 사업을 더욱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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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HP는 당시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고급화 전략을 이끌었다.



1920년 알파 로메오 시대를 개막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이 났지만, A.L.F.A는 생산에 대한 준비와 부품 수급 등의 복구 과정이 길어지며 빠르게 차량 생산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 사이 A.L.F.A는 사명을 알파 로메오로 바꾸며 재 도약을 준비한다. A.L.F.A 시절 주력 판매 모델이었던 20-30HP의 정상적인 생산 복귀를 위해 공장 설비 및 기반을 정리한 후 1920년, 알파 로메오 브랜드로 20-30HP E를 새롭게 출시한다.



새롭게 탄생한 20-30HP E는 4.2L 엔진을 더해 2,600RPM에서 67마력을 자랑했고, 최고 속도는 130km/h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더욱 스포츠 성향을 강조, 컴팩트 한 차체를 갖추고 전기 등화기와 전기 엔진 스타터를 장착한 20-30HP ES를 제작한다. 알파 로메오의 이름으로 등장한 20-30HP E와 20-30HP ES는 당시 포드 모델 T의 가격보다 3배 가량 비싼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메로시의 지휘 아래 전쟁 동안 판매가 힘들었던 40-60HP 또한 출력을 다시 한 번 82마력까지 끌어올려 재 판매를 시작했다.



알파 로메오는 재기를 알리며 다시 한 번 타르가 플로리오에 참전을 하며 알파 로메오의 건재를 알린다. 이 때 알파 로메오의 레이싱 팀에 소속 된 선수가 바로 페라리 최고의 양산 차량의 이름의 모티브이자 페라리의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Enzo Frerrari)였다. 드라이버를 이끄는 우고 시보치(Ugo Sivocci)의 지휘 아래에 페라리는 동료 안토니오 아스카리(Antonio Ascari)와 함께 알파 로메오 레이싱 팀의 활약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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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잎 클로버는 지금까지도 알파 로메오를 지키고 있다.



QUADRIFOGLIO의 등장

우고 시보치는 알파 로메오를 대표하는 뛰어난 드라이버였다. 1923년 타르가 플로리오를 앞두고 대회의 무탈과 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행운의 상징인 네 잎 클로버를 차량에 그려 넣었다. 흰 바탕에 녹색으로 칠해진 네잎 클로버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알파 로메오의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알파 로메오 차량과 레이스 머신에는 쉽게 네 잎 클로버 문양인 QUADRIFOGLIO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행운을 기원했던 우고 시보치는 같은 해 알파 로메오의 새로운 Tipo P1으로 살레르노에서 주행을 하던 도중 코너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인해 우고 시보치는 사망하며 그 생을 마감한다. 애석하게도 Tipo P1에는 QUADRIFOGLIO가 없었다. 우고 시보치의 사망으로 인해 QUADRIFOGLIO은 알파 로메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남았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P2과 함꼐 있는 비토리오 야노. 비토리오 야노는 알파 로메오의 부흥을 이끌어낸다.



알파 로메오의 부흥을 알리는 비토리오 야노의 시대

주세페 메로시는 알파 로메오의 성장과 정착에 큰 공을 세웠다. 엔지니어로서 차량의 완성도도 뛰어났고, 그로 인해 알파 로메오는 빠르게 명성을 얻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기를 선언한 알파 로메오에게는 변화가 필요했고, 메로시는 이미 60대가 넘는 나이가 되었다. 알파 로메오는 메로시의 뒤를 이을 사람을 찾았고, 피아트에 근무하던 비토리오 야노(Vittorio Jano)를 전격 영입한다.



알파 로메오로 이적한 비토리오 야노는 메로시의 뒤를 이어 알파 로메오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확실히 가져가기 위한 몇가지 변화를 도입하고 알파 로메오 역사에 남겨질 명 차량 P2를 개발한다. 1924년 크레모나 서킷에서 쉐이크 다운을 시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P2는 보닛에는 행운과 승리를 기원하는 QUADRIFOGLIO를 그려 넣고 1925년 자동차 선수권 대회 중 두 라운드를 우승을 하며 유럽을 휩쓸었다.



P2는 슈퍼차저를 더한2.0L 엔진으로 1925년 최대 155마력을 자랑하고 엔진 회전 수 또한 5,500RPM까지 끌어 올릴 수 있어 다른 차량들에 비해 성능적인 우위를 점했다. P2는 개량을 거치며 1930년까지 15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이스 머신으로 기록 되었다. 특히 1929년에는 몬자 그랑프리와 로마 그랑프리 등 6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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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의 고성능 차량인 RM은 뛰어난 성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시기 양산 차량으로는 6기통 타입의 알파 로메오 RL과 4기통 모델인 RM이 출시 되었다. RM은 2.0L 4기통 엔진에 4단 수동 변속기를 적용하고 40마력에서 최대 48마력을 발휘하고 최고 속도는 90km/h 수준이었다. 1920년대 중반, 알파 로메오 브랜드의 엔트리 급 세단이었다. RL의 경우에는 고성능 스포츠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6기통 2.9~3.6L 엔진들을 채용하면서 최소 56마력, 최대 125마력까지 뛰어난 출력을 보여줬고, 실제 알파 로메오의 드라이버들 또한 이 차량을 통해 레이스에 출전하기도 했다.



경영 위기로 국가의 품에 안기다.

고급화 브랜드의 부담은 브랜드에 경영 악화로 다가왔다. 특히 많은 비용이 필요한 모터스포츠에 참여 하기엔 알파 로메오의 생산, 판매량이 매우 부족했다. 알파 로메오는 1930년대 중반부터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다. 특히 1930년대에는 모터스포츠 활동을 확대하면서 재정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특히 일반 승용 차량은 물론 상용 차량 또한 소량 판매가 되었기 때문에 경영 위기는 더욱 커졌다.



결국 알파 로메오는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니콜라 로메오는 경영에 대한 무리를 느끼고 결국 알파 로메오는 1933년 국영산업 지주회사 IRI(Instituto Recostruzione Ingustriale)에 인수된다. 하지만 국영 기업이 된 후에도 알파 로메오는 기존의 경영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 국영 기업으로 전환된 알파 로메오는 더욱 고급스럽고, 이탈리아의 상류층을 위한 스페셜 차량들을 생산한다. 스페셜 모델을 생산하기 위해 알파 로메오는 피닌파리나(Pininfarina)와 자가토(Zagato) 등의 디자인 회사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서 고급화 전략을 강화한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알파 로메오는 1920년 중반부터 굵직한 차량들을 만들어 낸다. 사진은 6C 1500



알파로메오 6C와 8C 시대의 개막

1920년 후반부터 등장한 6C는 1930년대 들어 빛을 발한다. 고성능 쿠페 형태를 갖춘 6C는 말 그대로 6기통 엔진을 채용한 차량이었고, 가볍고 빠른 즐거운 차량의 테마에 맞춰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1.5L 엔진을 통해 44마력을 선보였고, 이후 스포츠 버전의 형태로 DOHC 엔진을 적용한 6C 1500 스포츠, 슈퍼스포츠 등이 등장하고 1928년에는 최고 속도 140km/h까지 달릴 수 있는 6C 1500 슈퍼스포츠 콤프레샤(Compressore) 등의 모델이 생산되었다.



가볍고 탁월한 주행 성능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고급 브랜드로 자리를 잡은 알파 로메오와 주력모델인 6C는 1931년도에1750 슈퍼 그란 스포츠 테스타 피사(Testa Fissa)나 1936년 1,000마일 레이스에 등장한 C6 2300 S 투어링 페스카라 스파이더 등의 유명 차량들을 남겼다. 이후 1954년까지 배기량을 꾸준히 키워가며 30년가까이 6C의 계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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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식 6C 2300 배기량을 키우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무장했다.



그와 함께 1930년 대 알파 로메오의 양산 차량 라인업을 담당했던 또 하나의 차량이 있는데 바로 8기통 엔진을 적용한 8C이 주인공이다. 1931년에 등장한 8C는 레이스 차량의 본격적인 양산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 알파 로메오를 대표하는 P2, 티포 A, 그리고 티포 B(P3) 등의 기술을 담아내고 2.3L 8기통 엔진을 적용한 8C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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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식 8C 2300 투어링 스파이더,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이목을 끈다.



초기 8C는 2.3L 수준에 머물렀으나, 1939년까지 점차 엔진 사이즈를 키우며 1938년 8C 2900B 르망 스페셜로 이어지며 2.9L까지 배기량을 늘려간다. 1931년에 등장해 1939년까지 강력한 성능과 완성도를 앞세운 8C는 모터스포츠에 자주 등장한다. 당시 알파 로메오는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한 엔초 페라이의 페라리를 레이스 운영 부서처럼 활용하며 8C의 강력함으로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1935년 8C-35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경우에는 3.8L의 엔진으로 최대 330마력을 뿜어내는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또한 최대 토크 역시 43kg.m 이상의 강력한 파워를 기록하며 탁월한 주행 성능을 보여줬다. 4단 변속기와 독립식 서스펜션 또한 탁월한 달리기 실력을 뒷받침 하는 최고의 구성 요소로 알파 로메오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페라리의 탁월한 레이스 운영 능력을 과시하는 좋은 교집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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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바람과 달리 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모터스포츠 정점에 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다시 한 번 알파 로메오는 경영 위기를 벗어날 기회를 맞이 했다. 특히 전쟁 초기 주축군의 기세가 매섭고, 그 내용 또한 유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국가적인 부강에 눈이 멀었다. 게다가 V1 로켓은 물론 제트 전투기 등의 뛰어난 기술을 자랑한 독일을 이탈리아가 뒷받침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더욱 더 주축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적어도 그 때까지는 장밋빛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독일의 소련 침략 야욕으로 인해 소련이 주축군 탈퇴하고 되려 동부 전선이 생겨 전력 구분에 부담이 생기고 미국의 대대적인 참전을 통해 전쟁은 주축군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틀어졌다. 결국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연합군의 반격에 무너진 주축군은 항복으로 패배를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다. 재기의 순간을 기대했지만, 패배로 인해 그 꿈이 무너진 알파 로메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터스포츠에 대한 욕심은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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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식 티포 159는 알파 로메오의 F1 2연패를 이끈 최고의 머신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시적으로 자리를 잡은 F1에 알파로메오는 158 Alfetta F1 머신을 당당히 출전한다. 1950년 제 1회 F1 시즌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알파 로메오와 그 드라이버인 주세페 파라나(Giuseppe Farina)가 초대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또한 2회 F1에서는 파라나의 뒤를 이어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가 알파 로메오 159와 호흡을 맞춰 알파 로메오의 2연패를 이끈다. 당시 독일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브랜드들이 강세를 보였던 것은 같은 패전국으로는 다소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생존을 위한 길을 선택한 알파 로메오

제 2차 세계대전을 패배했고, F1에서 우승을 했지만 알파 로메오의 지갑 사정은 좋지 못했다. 알파 로메오는 결국 생존을 위한 길을 택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그 어떤 자존심도 내려놔야 했다. 그 덕에 19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는 스포츠 차량 개발과 생산을 잠시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알파 로메오는 결국 소형 차량에 집중을 한다. 1950년 알파 1900의 등장으로 생존의 변화를 시도하고, 이후 줄리에타를 출시하며 소형 차량의 생산량을 늘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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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화의 선택에 컴팩트 줄리에타 스파이더가 등장한다. 사진은 1955년 식



1950년부터 생산에 돌입한 알파 1900는 현재 알파 로메오를 상징하는 역삼각형 프론트 그릴을 달고 100마력 급의 1.9L 엔진을 얹은 후륜 구동 차량으로 세단과 쿠페로 제작 판매 되었다. 4,400mm의 전장과 2,500mm의 휠 베이스를 가지고 전륜 서스펜션을 독립식 더블 위시본을 채용하며 탁월한 주행성능을 자랑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판매량 또한 나쁘지 않았다.



줄리에타는 알파 1900이 등장하고 난 후 1954년부터 판매가 된 차량으로 그 첫 공개는 1954년 토리노 모터쇼(Turin Motor Show)였다. 줄리에타는 알파 1900보다 더욱 컴팩트한 1.3L 엔진을 얹은 차량이었다. 휠 베이스 또한 2,400mm를 채우지 못했고, 차량의 무게 또한 줄리에타 세단이 915kg 였고, 스파이더와 경량 스프린트 모델은 더욱 가벼웠다. 1959년과 1961년 페이스 리프트를 진행했고 생산이 중단된 1964년까지 13만 여대 이상 판매되며 알파 로메오를 견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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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2600은 유려한 디자인과 탁월한 드라이빙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60년대 컴팩트 시대로 회생의 길을 찾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은 알파 로메오에게 다시 한 번 부흥의 시기가 되었다. 소형 차량도 자리를 잡았고 50년 대 후반 미국 시장을 개척하며 새로운 수익 채널이 생겨 경영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특히 소형 스포츠 세단인 줄리아와 줄리에타 쿠페와 스파이더, 알파 로메오 2600 쿠페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1965년도에는 1930년대 알파로메오의 멋을 담아낸 그란 스포츠 콰트로루오떼(Quattroruote)를 생산, 소량 판매하며 브랜드의 가치 또한 끌어올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줄리아의 판매와 생산을 대량으로 늘렸고, 알파로메오 2000, 줄리에타 스파이더에 소형 패밀리 세단인 알파수드(Alfasud)와 알페따(Alfetta)를 생산하며 경영 환경을 개선했다. 특히 이탈디자인의 손을 거친 알페따의 패스트백 모델은 1974년도에 등장한 폭스바겐 골프의 원형이라 평가될 만큼 유사한 디자인을 가지고, 컴팩트한 차체와 뛰어난 주행 성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알파 로메오 브랜드 히스토리 - 역경과 고난 끝에도 자신의 길을 걷는 알파 로메오

1975년 식 알페따, 패스트백 해치백의 전형에 가까운 디자인을 갖췄다.



1972년 알파수드의 생산과 함께 엠블럼에 변화가 생겼는데, 바로 그동안 엠블럼을 둘러 싸고 있는 푸른 링에 새겨져 있던 밀라노가 빠지게 된 것이다. 이는 알파수드의 생산을 밀라노가 아닌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의 포미리아노(Pomigliano, Napoli)에 자리를 잡은 새로운 공장에서 생산을 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차량의 마지막 생산 과정을 모두 밀라노에서 했던 알파 로메오는 이 때부터 밀라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차량 생산을 시작했고, 엠블럼의 ‘MILANO’ 레터링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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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티포 33TT12는 500마력의 출력을 앞세워 막강한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알파 로메오, 끊지 못할 취미를 다시 시작하다.

금단 현상을 이기지 못한 알파 로메오는 끊었던 습관은 다시 시작했다. 바로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다시 표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알파 로메오는 베르토네(Bertone)가 디자인한 줄리에타 쿠페에 스트레이트 4라 부르는 강력한 1.6L 엔진을 얹어 개발한 고성능 레이스 머신인 GTA를 앞세워 세계 레이스 대회에 참전을 했다. 경량 차체에 최대 170마력의 힘을 발휘한 GTA는 1966년 미국의 스포츠카 클럽의 트랜스 암(Sports Car Club of America ‘s Trans-Am @1966) 대회를 시작으로 우승 행진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프로토타입 레이스에 참전을 한다. 알파 로메오는 1966년에 공개한 티포 33(Tipo 33)를 앞세워 프로토 타입 레이스에 뛰어들어 데이토나와 르망 등에 출전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최고의 티포 33으로 기록된 차량은 바로 알파 로메오 티포 33TT12인데 12기통 3.0L 엔진을 통해 500마력의 출력을 선보였다. 알파 로메오 티포 33TT12는 1974년 몬자 1,000km 레이스에서 우승을 하며 그 이름을 알렸는데, 이듬 해 1975년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십(World Sportscar Championship)의 메이커 순위에서 개막전을 제외하고 시즌 8경기 중 7경기를 우승으로 이끌며 챙기며 최강의 레이스 머신으로 기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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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협력을 통해 닛산의 파르샤를 알파 로메오의 ARNA으로 판매했다.



또 다시 치욕을 맛본 알파 로메오, 원수의 품에 안기다.

70년대 중반을 지나며 알파 로메오는 고질적인 경영 악화를 다시 겪게 된다. 이탈리아 정부는 알파 로메오의 매각과 회생의 길을 알아보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몇몇 기업들과 진행 되던 이야기들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80년대 초반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닛산(Nissan)과 전략적인 업무 제휴를 체결해 ARNA(Alfa Romeo & Nissan Automibili)를 설립해 닛산의 소형 차량인 파르샤(Pulsar)를 ARNA라는 이름으로 판매 했다. 소형 차량과 일본의 합리적인 차량 설계, 개발에 대한 프로세스를 얻은 알파 로메오는 모르겠지만, 닛산은 알파 로메오에게 얻은 이득이 없었고, 이내 1985년 ARNA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닛산에게 뺨을 맞은 한 편으로는 미국에서 바다 건너 들려온 소식을 호재로 파악하고 내부에서는 다시 한 번 반등을 기대했다. 그들이 들은 소식은 바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오일 쇼크였다. 오일 쇼크를 시작으로 여러 경제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미국의 경제가 침체 되었고 피아트와 MG, 오스틴 힐리(Austin Healey) 등의 많은 유럽 브랜드들이 미국에서 철수를 선택하며 경쟁자들이 줄었다. 게다가 60년대 이후 그 동안 컴팩트 차량에 대한 개발을 꾸준히 해온 알파 로메오의 경쟁력이 부각 될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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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의 스파이더는 일본의 모방품 마쯔다 미아타에 철저히 무너졌다.



게다가 알파 로메오는 자신들의 기술력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생각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 인해 차량의 완성도를 끌어올리지 못했고, 차량 제작에만 집중해 마케팅과 판매 채널을 확보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게다가 일본 마쯔다(Mazda)가 알파 로메오의 감성을 담아내며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한 미아타(Miata)가 뛰어난 주행 성능과 완성도를 보여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알파 로메오 침몰에 일격을 가했다.



이후 포드(Ford)가 알파 로메오에 관심을 보였으나 포드의 선택은 알파 로메오가 아닌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공을 들였던 마쯔다와 볼보(Volvo)였고, 알파 로메오에 대해서는 인수와 구조조정 등의 몇가지 방법을 고민하다 손을 털었다. 1987년 알파 로메오는 지역 감정과 가문의 갈등으로 원수와 같았던 피아트 그룹에 인수 합병된다. 피아트는 당시 판매량이 부진했던 란치아(Lancia)와 알파 로메오를 하나로 묶어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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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의 품 속에서 실용성을 갖춘 145와 155를 통해 경영 위기를 타개한다.



피아트, 알파 로메오의 안정을 꾀하다.

알파 로메오는 1990년대 경영 정상화에 집중했다. 피아트 또한 알파 로메오의 정상화에 많은 신경을 썼다. 우선 일본 브랜드에 참패한 미국 시장에서 얻을 이익은 없다고 판단하고 1995년 미국 시장에서 완전 철수를 선언한다. 그리고 피아트의 타입 3 플랫폼을 이용한 실용적인 세단 155와 타입 2 플랫폼을 채용해 훗날 147과 새롭게 부활하는 줄리에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145을 출시한다.



알파 로메오 155는 전륜 구동 방식을 채용하고 차량의 전장을 4,443mm으로 제한하고 휠 베이스 또한 2,540mm로 마무리 했다. 채용된 엔진 또한 1.7L 가솔린 엔진부터 다양한 엔진을 채용했는데, 눈에 띄는 것은 2.0L 터보 엔진과 2.5L V6 엔진을 채용한 고성능 모델을 둬 달리기 성능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남겨뒀다. 또한 실용성을 위해 디젤 엔진도 적용했다. 155는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총 19만 여대가 판매 되며 경영 정상화의 선봉에 섰다. 그 덕에 피아트는 알파 로메오의 모터스포츠 활동을 막지 않았다. 그로 인해 155은 이내 독일 최고의 레레이스 대회인 DTM에 출전했고, 영국의 BTCC 등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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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155 V6 TI은 DTM에 출전에 맹활약 했다.



레이스를 위해 개발된 155 V6 TI는 DTM 전용 차량으로 2.5L V6 엔진을 적용했으며 1996년 버전의 경우에는 480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선보였고, 최고 속도 또한 300km/h에 이르렀다. 155 V6 TI에는 최근까지 활약을 했던 니콜라 라라니(Nicola Larini)를 비롯해 알렉산드로 나나니(Alessandro Nannini)등 유수의 드라이버들이 호흡을 맞췄으며 현재까지도 WTCC에서 활약하고 있는 가브리엘 타르퀴니(Gabriele Tarquini) 또한 155 V6 TI에 올랐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이 디자인을 했던(Chris Bangle) 147는 독특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왜건과 해치백의 경계에 있는 듯한 디자인을 가진 147은 실용성으로 무장한 차량이었다. 90마력 수준의 1.4L 가솔린 엔진부터 최대 153마력 급의 2.0L 트윈 스파크 엔진까지 채용하고, 디젤의 경우에는 1.9L 엔진으로 성능보다는 실용성에 집중한 145는 이후 146으로 이어지며 시장에서 좋은 평가와 판매 실적을 올렸다.



침묵과 인내의 2000년대, 때를 기다리다.

알파 로메오는 2000년대를 큰 이슈 없이 묵묵히 보낸다. 해치백 모델인 147과 세단 영역을 담당한 155에 뒤를 이어 156를 이내 출시한다. 156의 경우에는 세단과 왜건 타입으로 출시가 되었는데, 전륜 구동 임에도 뛰어난 운전 성능을 자랑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시장에서의 판매 또한 97년부터 2007년까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총 68만 여 대가 판매되는 좋은 반응을 보여줬다. 156 GTM 같은 고성능 모델을 출시했고 1998년부터 이탈리아 슈퍼 투어링 카 챔피언십을 휩쓸고, 2000년대 초반에는 WTCC의 전신인 ETCC와 영국의 BTCC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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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의 디자인을 다듬은 147은 총 58만대가 판매 되었다.



컴팩트 해치백으로 변한 147은 더욱 실용적인 차량으로 변신했고, 디자인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월등하게 개선되어 58만대라는 판매고를 이뤄냈다. 이런 풍족한 환경 속에서 컨셉 차량 비스콘티(Visconti)와 카말(Kamal) 등의 디자인을 계승해 2005년 알파 로메오는 3도어 스포츠 해치백 브레라(Brera)와 156의 뒤를 잇는 159를 발표했다. 159는 156에 이어 시장 반응이나 판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차량에 대한 평가 또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2006년 European Car of the Year 차량에 선정되며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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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브레라는 뛰어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사람들의 이목은 고성능 모델인 브레라에 더욱 집중되었다. 159와 같은 플랫폼을 채용해 컴팩트한 크기를 가지며 2.2L 엔진과 3.2L 엔진 등을 주력으로 내세우며 전륜 구동과 사륜 구동 시스템을 통해 탁월한 브라이빙 퍼포먼스를 자랑했고, 해치백과 스파이더 모델을 출시해 디자인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2006년 등장과 함께 브레라는 유럽 자동차 디자인 대상을 받고, 오토카(AutoCar) 매거진이 선정한 2006 베스트 디자인에 올랐다. 그러나 알파 로메오는 브랜드 전략이나 사업 방향에 있어 전면적인 변화나 개선의 시도는 하지 않고 움츠린 몸을 쉽게 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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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는 고성능 모델 8C 콤페타지오네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미국 시장 재진입 선언과 8C Competizione 그리고 4C

2000년을 지나며 알파 로메오는 열정의 표출을 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꾹 참아왔다. 그러나 그 인는 이내 끝나게 된다. 2006년을 지나며 판매 실적과 공격적인 드라이빙을 가능케 하는 차량들이 등장하고, 시장 상황이 좋아지자 알파로메오는 사업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새로운 차종의 공개를 서두른다. 바로 미국 시장의 재진입과 고성능 스포츠 쿠페인 8C 콤페타지오네(Competizione)의 출시를 알린 것이다. 이미 알파 로메오는 8C 콤페타지오네에 대한 준비를 마쳤고, 8C 콤페타지오네 를 받치는 차량으로 미토와 줄리에타 등을 준비한 상태였다.



지난 1995년 미국 시장에서 손을 뗐지만 알파 로메오의 감성과 개성에 맛을 들린 마니아들은 알파 로메오를 그리워했다. 알피스티(Alfisti)라고 불리는 이들은 꾸준히 알파 로메오의 미국 복귀를 요구했고 그에 맞춰 2006년 미국 시장의 재진입을 선언했다. 미국 시장 재진입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순차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미토와 줄리에타를 공개하며 라인업을 다져 ‘부작용’에 대한 방지책도 미리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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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량 스포츠 쿠페 4C는 민첩한 드라이빙을 앞세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단 500대만 판매한 8C 콤페타지오네는 2008년 11월 첫 미국 판매 분이 미국 땅을 밟았고, 이후 89여대가 더 팔리며 총 90대가 미국에 판매되었다. 4.7L 엔진에 444마력을 자랑하고 48.9kg.m의 최대 토크로 뛰어난 드라이빙 퍼포먼스를 갖춘 8C 콤페타지오네는 이내 알파 로메오의 브랜드를 이끌며 알파 로메오의 미국 재진출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미토와 줄리에타 등을 내세워 판매 볼륨을 키우고, 이후 경량 스포츠 모델인 4C를 추가 발표한다.



201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컨셉 차량을 발표하고 2013년 공식 데뷔한 4C는 카본 모노셀 바디를 기반으로 경량 스포츠 쿠페를 지향하고 있는데, 로터스의 차량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모데나(Modena)에 위치한 마세라티 공장에서 생산되는 4C는 1.8L의 컴팩트한 엔진으로 240마력을 자랑하고 차량의 크기 또한 3,989mm로 순수한 달리기 성능에 집중된 차량이다. 차량의 무게는 900kg가 채 안 되는 895kg로 뛰어난 주행성능과 민첩한 움직임을 자랑한다. 2013년 컴팩트 스포츠카 중에서 ‘최고의 스포츠 카’의 영광을 얻으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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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는 줄리에타, 미토 등을 앞세워 볼륨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꿈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운 알파 로메오

알파 로메오는 지난 시간 동안 많은 부침과 고난 속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꿈과 현실의 괴리를 경영 위기로 직접적으로 느껴가고, 다른 회사의 소유가 되어 가며 배워왔다. 그 결과 알파 로메오는 현실과 꿈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미토와 줄리에타 그리고 4C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아직 경영 상황이 파란 불이라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즐거운 차량을 만들기 위해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알파 로메오는 퓨어 드라이빙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컴팩트 로드스터의 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른 자세를 취했다. 바로 무에서부터 만드는 것이 아닌 이미 기존의 타인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며 알파 로메오 만의 매력을 담아내겠다는 것이다. 알파 로메오가 손을 잡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80년 중후반, 알파 로메오를 미국 시장에서 침몰시켰던 마쯔다였다. 과거 마쯔다가 알파 로메오를 모방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입장이 바뀐 상황이다. 물론 그런 점이 알파 로메오가 마쯔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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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팩트한 스파이더 모델은, 스파이더를 쓰러뜨렸던 마쯔다 미아타를 모태로 한다.



알파 로메오는 새로운 경량 로드스터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를 이미 검증된 펀 투 드라이브(Fun to Drive) 차량인 MX-5를 기반으로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지난 20년 동안 마쯔다가 꾸준히 축적한 바디워크에 대한 경험을 단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개발 과정의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알파 로메오는 마쯔다와의 기술 제휴와 부품 공유 비율을 줄이면서 알파 로메오 만의 매력을 담아 2015년 공식 출시를 위해 개발 중에 있다.



미래로의 길만이 남은 알파 로메오

알파 로메오는 이제 앞으로 갈 길 만이 남았다.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하든, 지난 과거의 경험으로 알파 로메오는 이겨내며 또 다시 자신들의 고집과 전통을 지켜낼 것이다. 이탈리아의 브랜드답게 그들의 개성은 그 누구도 쉽게 누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분명 즐거운 일이라 생각된다. 알파 로메오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될 수 밖에 없다.

사진 : 알파로메오 (http://www.alfaromeo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