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G90 오각그릴 탄생의 비밀..벤틀리가 싫어해

by오토인 기자
2019.08.01 18:41

[이데일리 오토in] 카가이 이준호 기자= 1919년 창립한 벤틀리는 올해로 딱 100주년이 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EXP 100 컨셉트카를 내놨다. 디자인은 브랜드의 시각적 표현 방식이다. 아예 백지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축적된 디자인 풀에서 꺼내 응용하기도 한다. 역사가 긴 브랜드라면 후자가 표현 방법에 있어 논리적이다. 역사가 짧은 신생 브랜드는 창조를 해야 한다. 아니면 베끼던가! 벤틀리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럭셔리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는 고객층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보수적인 표현 방식으로 디자인을 한다. 좋게 말하면 헤리티지를 살린 디자인이란 말이다.

1929년부터 1998년까지 롤스로이스 산하에 있던 벤틀리는 얼굴(그릴과 헤드라이트 등)이 롤스로이스와 많이 닮았다. 수직의 그릴 핀과 동그란 트윈 헤드램프는 리틀 롤스로이스처럼 보였다. 그러다 폴크스바겐에 매각된 후 새로운 디자인으로 환골탈태했다.

벤틀리는 제일 먼저 라디에이터 그릴을 손봤다. 로마시대 신전 판테온 기둥을 형상화한 롤스로이스 그릴과 같은 핀 형태를 버렸다. 철사를 격자 모양으로 꼬아 놓은듯한 망 형태로 바꿨다. 아주 전통적 모양새다. 2003년에는 새로운 모델 컨티넨탈 GT가 공개되었다. 차세대 디자인었지만, 플라스틱으로 사출한 그릴 무늬만 바뀌지 않았다. 이런 망 형태의 그릴은 벤틀리의 헤리티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EXP 100 콘셉트는 전기차라 그릴이 필요 없다. 대신 하나의 거대한 빛의 장식물로 만들었다. 빛이 나는 모양은 당연히 망 형태다. 격자 모양의 망은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마름모꼴이다. 이를 가지고 프로토타입에선 시트의 퀼팅, 송풍구 테두리, 휠 버튼을 꾸미는데 쓰였다. 크리스털을 상징했다는 헤드라이트의 장식 문양도 망 형태의 그릴에서 시작됐다. 즉, 벤틀리는 마름모꼴을 패턴으로 해서 디자인을 완성했다.

문제는 바로 하단 에어 인테이크다. 마름모꼴을 응용했다. 그릴과 다르게 마름모를 패턴으로 가득 메우지 않았다. 그러기에 패턴이 끝나는 지점의 마름모 꼭지점은 연결 없이 남는다. 그것을 직선으로 연결해 전형적인 수평라인 그릴을 만들었다. 복잡한 패턴을 단순한 선으로 치환하는 매력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눈에 익는다. 3개월 전 4월 19일 뉴욕 모터쇼에서 선보인 제네시스 민트 컨셉트에서다. 외부 패널 하단과 휠 디자인에 동일한 방식이 쓰였다. 물론 아주 동일하지는 않다. 민트의 것엔 3D 입체성이 덧붙여진 좀 더 고차원적인 형태다.

인테리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P 100 콘셉트의 파노라믹 루프엔 그릴과 같은 마름모꼴 응용 패턴이 쓰였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광섬유로 이뤄졌다. 자연광을 흡수한 후 프리즘을 통해 실내를 밝히는 데 사용된다. 친환경 기술이 접목된 디자인이다.

제네시스 민트 콘셉트 인테리어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눈에 띈다. 대신 익스테리어와 마찬가지로 벤틀리와 표현방식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뉘앙스는 같다. 마름모꼴이 존재하고 그것과 연결된 선은 모두 꼭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를 제네시스에선 지-매트릭스(G-Matrix)라 부른다. 지-매트릭스는 현대차가 벤틀리에서 이상엽 디자이너를 영입한 뒤부터 제네시스 디자인 랭귀지로 공표됐다. G90 라디에이터 그릴, DRL, 휠에는 마름모꼴을 패턴으로 활용한 디자인이 다수다. 물론 민트 컨셉트에서도 지-매트릭스는 디자인을 수식하는 유일한 디자인 랭귀지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매트릭스(G-Matrix)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트릭스의 사전적 의미는 망이다. G와 Matrix 사이에 대시로 구분해 놓은 것을 보니 G는 Genesis의 이니셜임을 알 수 있다. 제네시스 망이란 뜻이다.

라디에이터 그릴은 일종의 망이다. 운행 중에 낙하물과 작은 동물들이 라디에이터와 충돌하는 것을 막는 역할이다. 여기에 바람까지 통해야 하니 망의 형태이어야 한다.

벤틀리의 그릴 디자인은 유독 망처럼 보인다. 그래서 벤틀리 라디에이터 그릴을 벤틀리 매트릭스 그릴이라 부른다.

고래수염 같은 멋진 그릴을 가졌던 링컨 컨티넨탈은 새로운 디자인 수장 데이비드 우드하우스가 오면서 바뀌었다. 엠블럼 형태를 패턴으로 쓴 결과물이지만, 벤틀리 것을 벤치마킹했다는 혹평을 들었다. 새로운 링컨 마스크는 전 라인업에 적용되면서 호응을 얻고 있지만, 불행히도 데이비드 우드하우스는 닛산으로 이직하고 말았다.

지-매트릭스는 벤틀리 매트릭스에서 유래됐다. 그래서 같은 뉘앙스의 패턴 디자인이 새로운 모델이 등장할 때마다 충돌한다. 디자인의 원작자와 그 소유권자의 권리를 가지고 왈가불가 하자는 건 아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링컨 컨티넨탈의 사례에서 봤듯이 프리미엄 이상 급의 브랜드에서 디자인 카피캣은 민감한 사항이 된다.

내년 등장을 목표로 G80 위장막 사진이 나돈다. 오목한 트렁크 패널을 보니 컨티넨탈 GT의 모습이 엿보인다. 제네시스의 벤틀리화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전 직장 벤틀리 디자이너 감각이 현재 직장인 제네시스에서도 재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 아성을 신생 브랜드가 뒤엎기는 힘들다. 제네시스 매트릭스가 벤틀리 매트릭스를 차용한다 해서 이득 보는 일은 없을 거다.

반대로 벤틀리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다. 새로운 플라잉 스퍼의 그릴에선 수직의 크롬 핀으로 매트릭스를 가려 버렸다. 컨티넨탈 GT와 플라잉 스퍼의 얼굴은 패밀리룩이었다. 이젠 노선이 달라진 것이다. 벤틀리는 헤리티지를 파괴하는 급한 수를 두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뉘앙스다. 급하거나 자신 없는 디자인은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제네시스엔 잘 된 일이다. 지-매트릭스의 완성도를 높여 제네시스만의 차별화된 디자인 랭귀지로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적어도 렉서스의 엘-피네스(L-Finess) 정도는 뛰어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