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 대기업·노조만 혜택…임금·연금체계 개편부터

by정병묵 기자
2025.11.11 06:07

[전문가와 함께 쓰는 스페셜리포트]②
성균관대 서울RISE글로벌혁신센터·국정전문대학원 김덕호 겸임교수
인건비 급증, 신규 채용 축소…청년층이 피해 떠 안아
중기 근로자에게 의미 없어…기업 인건비 부담만 늘려
日, 정년폐지·연장, 계속고용·재고용 중 하나 선택토록

[김덕호 성균관대 서울RISE글로벌혁신센터·국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한국의 임금체계는 여전히 ‘연공급(年功給)’ 중심이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상승하는 구조로, 은퇴 시점의 임금이 입사 시점보다 3.2배 높다. 이는 일본(2.1배)이나 유럽연합(EU) 평균(1.8배)보다 훨씬 가파르다. 이런 구조에서 정년을 법으로 늘리면 기업은 급증한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청년층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2020년 한국개발연구원(KDI) 한요셉 연구위원의 연구를 보면, 2016년 60세 정년 의무화 이후 고령층(55~60세) 고용은 증가했지만, 청년층(15~29세) 일자리는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2024년 서울시립대 송헌재 교수팀 역시 정년 연장 공표만으로도 기업들이 채용을 미리 축소하는 선제 반응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 통계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2016~2024년 사이 55~59세 근로자가 1명 늘면, 23~27세 청년 근로자는 1.5명 줄었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그 폭이 컸다.

지난 10월 29일 강원 강릉시의 2026년 환경관리원 신규 채용 체력 시험에서 응시자들이 ‘마대 메고 100m 달리기’를 하고 있다. 이번 강릉시 환경관리원 일반전형 총 10명 모집에는 99명이 지원해 9.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이처럼 정년 연장은 고령층의 소득 공백을 메우는 대신, 청년층의 취업 공백을 키우며 고용시장 전체에 즉각적인 충격을 준다. 이는 단순한 일자리 수의 감소를 넘어 청년들이 기업의 핵심 인재로 성장하고 경험을 쌓을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가 고용 지형을 빠르게 바꾸는 지금의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 고용동향에 따르면 2025년 9월 기준 20대(20~29세) 고용률은 60.7%로 전년 동월 대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청년 고용률은 17개월 연속 감소했고, 구직을 포기한 청년은 43만명을 넘어섰다. 반면 55~64세 고령층 고용률은 66.6%로, 전체 고용률 상승을 견인하고 있다. 고령층 취업자는 978만명으로 1년 새 34만 명 이상 증가했다. 고령층 고용이 늘고 청년 일자리가 줄어드는 세대 역전 현상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다.

◇정년 혜택은 대기업 15%만의 특권인가

정년 연장은 또 다른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는 전체의 약 15%에 불과하다. 나머지 85%는 중소기업, 영세사업체,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등이다. 중소기업은 이미 인력난에 시달리며 정년을 자발적으로 65세 이상으로 높이거나 사실상 폐지한 곳이 많다. 실제로 사업체 노동력조사에 따르면 300인 미만 사업장의 평균 정년은 61.5세로, 대기업(60.2세)보다 오히려 높다.

우리나라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심각성은 최근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구직자 10명 중 8명이 중소기업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년층의 시선이 대기업으로만 쏠리는 현실 속에서 ‘좋은 일자리’와 ‘그저 일자리’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대기업 근로자에게 퇴직은 곧 절벽에서의 추락을 의미하지만, 중소기업 근로자에게 정년 연장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중소기업은 법정 정년 논의와는 무관하게 이미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오히려 강제적인 정년 연장은 인건비 부담만 늘려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건설·감리 전문업체 I건축사사무소는 숙련도가 곧 생산성과 직결되는 업종 특성상 정년을 65세로 설정하고, 88세까지 근로자를 재고용하면서도 급여를 삭감하지 않는다. 구두 제조 중소기업 B사 역시 인력난과 숙련 인력 유지를 위해 오래 전부터 정년과 관계없이 ‘100% 고용’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중소기업은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고령 근로자를 계속 고용하고 있다. 법으로 정년을 일률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 기업에 강제적 비용 증가를 안기고,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법정 정년 연장의 수혜는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강한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 등 소수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모든 세대가 공정하게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모델 절실

성균관대 서울RISE글로벌혁신센터 및 국정전문대학원 김덕호 겸임교수
정년 연장 논의는 ‘노동시장 전체의 고령화 대응’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불균형 구조가 숨어 있다. 물론 고령층의 일할 권리 보장과 사회안전망 강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년 연장만으로는 세대 간 고용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첫째, 임금체계 개편이 전제돼야 한다. 연공급 중심의 구조에서는 어떤 정년 정책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이 성과와 생산성에 맞는 임금체계를 도입해야 고령자 고용이 ‘부담’이 아닌 ‘선택’이 될 수 있다.

둘째, 소득 공백은 연금제도로 해결해야 한다. 국민연금 수급 연령이 65세로 늦춰지는 만큼, 퇴직연금·개인연금 등 다층적 노후소득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정년 연장만으로 소득 공백을 단순히 근속기간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안정된 노후를 담보할 수 없다.

셋째, 일본식 계속 고용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2004년부터 기업에 ‘고령자고용 확보조치’를 의무화해 정년 폐지, 정년 연장, 계속 고용, 재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재고용 시에는 계열사 전출 등 다양한 형태를 인정해 유연성을 확보했다.

넷째, 고령자 고용 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이 노사 합의로 고령 근로자를 재고용하거나 계속 고용을 유지할 경우, 인건비 지원·세제 혜택·직업훈련 등을 확대해 ‘의무’가 아닌 ‘유인’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