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피닌파리나와 결별한 페라리..디자인 방향은 어디로
by오토인 기자
2019.06.25 09:10
[이데일리 오토in] 카가이 이준호 기자= 페라리 디자인은 이탈리아 디자인 전문 기업인 피닌파리나 디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까지 피닌파리나 손을 거치지 않았던 모델은 Dino 308 GT4(1973년)와 라페라리(2013년) 단 두 대뿐이다. 둘의 파트너십 역사는 1951년부터 시작했다. 2013년 Sergio 콘셉트카를 마지막 이별 선물로 나눈 시점까지 총 62년의 역사다.
Sergio는 창업주 피닌파리나의 손자인 Sergio Pininfarina를 의미한다. 그는 피닌파리나의 대표였으며, 페라리 보드멤버이기도 했다. 2012년 7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페라리와 피닌파리나의 돈독한 관계에 중심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둘의 관계는 세르지오란 구심점이 상실되자마자 끊어졌다. 급작스러운 결말 같지만, 페라리의 독립 준비는 빨랐다. 2010년 페라리 본사가 위치한 이탈리아 마라넬로시에 4층 건물의 Centro Stile Ferrari(디자인센터)가 들어섰다. 초대 수석 디자이너로 플라비오 만조니(Flavio Manzoni)가 영입됐다. 만조니는 이탈리아인이다. 산업 디자인으로 이름 높은 플로렌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폴크스바겐 그룹을 세계 1위로 올려놓았던 디자이너 발터 드 실바도 같은 이탈리아인으로서 건축학을 전공했었다. 이런 인연 때문일까? 만조니는 페라리로 오기 전 4년 동안 폴크스바겐에서 발터 드 실바와 함께 근무했다.
만조니 대표 모델로는 란치아 입실론(Ypsilon), 피아트 500, 폴크스바겐 업(UP) 등이 있다. 슈퍼카 디자인이 처음인 그가 페라리로 와서 내놓은 첫 결과물은 'FF'와 '라페라리'다. FF는 페라리 최초의 슈팅 브레이크 스타일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뒷좌석과 트렁크를 겸비한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피닌파리나와 공동작업이었지만, 콤팩트카 디자인에 특화돼 있던 만조니 역량이 패키지 디자인 쪽에 많이 반영됐다.
라페라리는 피닌파리나의 영향력을 아예 받지 않은 첫 모델이다. 또 전기모터가 달린 최초의 하이브리드 카로 독특한 포지션을 갖는다. 그래서일까. 라페라리 디자인은 기존 디자인과 큐를 달리한다. T자 형태의 구조를 앞, 뒤 마스크로 가져간 것이나 C필러를 치고 올라간 벨트라인 등은 생소했다. 하지만 에어터널 구조나 레이아웃은 그 이전 슈퍼카에서 흔히 봐왔던 구조다.
피닌파리나와 만조니 디자인 경향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모델이 바로 458과 488이다. 458은 피닌파리나의 결과물이다. 488은 만조니가 이끄는 페라리 디자인 센터 작품이다. 488은 458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처럼 보일 정도로 변화가 크지 않다. 유일하게 큰 차이점은 미드십 엔진 흡기를 위한 에어 인테이크 표현이다.
458은 C필러에 감추듯이 에어 인테이크가 자리 잡는다. 반면 488은 리어 휀더에 도드라지게 뚫려 있다. 즉 피닌파리나는 과격하고, 표현주의적인 디자인을 지양한다. 458을 정측면으로 봤을 는 에어 인테이크를 찾을 수 없다. 매끈하고 우아한 패널이 디자인 전부를 수식한다. 경쟁사인 람보르기니가 카운타크의 파괴적 전위성을 디자인 원천으로 이어가고 있다면 피닌파리나의 페라리는 잘 정돈되고 길들여진 명마(名馬)의 매끈함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만조니는 62년 만에 페라리를 성형해야 하는 집도의가 되었다. 488의 모든 패널에는 강력한 엣지가 춤을 춘다. 흡사 명마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듯싶다. 최근 작(作) F8에 와서는 헤드라이트 각이 단단해졌다. 범퍼 스플리터는 능동적 공격성을 띤다. 458 스플리터와 덕트가 들어오는 공기를 매끈하게 다루어 잘 빠져나가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면 F8은 공기를 찾아 빨아들일 것처럼 생겼다. 또 덕트는 빨아들인 공기를 강제적으로 배출시키는 토출구 모양새다. 이는 형태를 추가하고, 투톤 컬러 매치를 적극 활용해 얻은 결과다. 패널의 매끈한 여백 따윈 피닌파리나식 수줍음으로 취급한다. 도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이게 끔 패널은 디자인 요소로 가득 채웠다.
페라리 최초의 PHEV 모델인 SF90 Stradale의 디자인도 그렇게 바뀌는 줄 알았다. 모델명 SF는 페라리 F1 디비전 Scuderia Ferrari를 뜻한다. SF90 Stradale는 페라리의 F1 머신 SF90의 로드고잉 버전이란 의미다. 약 1000마력에 0-100km/h 2.5초, 0-200km/h 6.7초가 걸린다. 라페라리보다도 빠르다. 즉 라페라리를 대신할 페라리 최고의 하이퍼카 포지션이다.
역대 페라리 하이퍼카들 F40, F50, Enzo, 라페라리는 다른 라인업과 차별화된 디자인을 추구했다. SF90 Stradale 디자인도 마찬가지지만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신선하다. 그 방향은 총 2가지다.
방향 1. EV 주행 특성을 반영한 패널 디자인SF90 스트라달레(Stradale)엔 앞 엑슬에 2개, 뒤 기어 박스에 1개, 총 3개의 전기모터가 있다. 이들은 합쳐 220CV의 힘을 낸다. 25km를 전기로만 갈 수 있다. 앙칼진 엔진음과 배기음 없는 전기차 페라리가 된다. 소리만 없어지는 게 아니다. eD(e-drive) 모드에서는 NVH(Noise, Vibration, Harshness)가 없다. 고로 진동도 없어져 모든 불쾌감이 사라진다. 고요하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주행이 가능하다.
페라리 익스테리어 패널 디자인은 이런 주행 특성을 반영했다. None NVH하다. 잔 기교를 줄인 패널은 조약돌같이 매끄럽고 부드럽다. 엣지를 많이 쓰면 모나 보인다. 실루엣을 강조하는 엣지를 제외하고는 절제됐다. 리어 패널이 절정이다. 배기구를 둘러싼 패널은 풍만하고 보드라와 보인다.
방향 2. 기존 미드십 실루엣을 파괴하다SF90 Stradale 비례는 F8과 동일한 미드십 레이아웃이다. 휠베이스가 동일해 비례 역시 큰 차이 없다. 하지만 스타일은 파격적이다. 20년 동안 이어온 미드십 스타일에서 탈피, 리어 패널을 루프까지 끌어올렸다. 기존 미드십은 리어 윈도우와 엔진 커버 역할이 동일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스타일에선 벨트라인, 루프, C 필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리어 윈도우와 엔진 커버 역할을 분리시켰다.
만조니는 이와 같은 스타일을 라페라리에서 먼저 시도했었다. A 필러와 루프를 블랙 컬러로 처리하고, 벨트라인을 루프까지 끌어올렸다. 완성된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12기통에 6,000cc의 커다란 엔진을 얹은 라페라리는 리어 휠 주변 패널이 비대해 보였다.
PHEV 파워 트레인은 라페라리에서 보인 시각적 비례의 단점을 보완할 절호의 기회다. 8기통 3990cc로 줄인 내연기관에 전기모터의 조합은 하이퍼카 수준의 출력을 선사하면서 디자인의 자율성을 높여 줬다. SF90 Stradale의 전고는 1,186mm로 동일한 8기통의 F8보다도 20mm가 낮아졌다. 낮아진 전고로 A 필러는 더 눕힐 수 있었고, 루프라인은 더욱더 매끄럽게 그릴 수 있었다. 피닌파리나의 미드십 캐빈은 마치 비행기의 콕피트처럼 볼록했다면, 만조니가 완성한 미드십 캐빈은 패널과 단단히 결합된 완성체처럼 보인다.
플라비오 만조니를 폴크스바겐에서 데리고 와 디자인 독립을 이뤄낸 페라리. FCA(피아트 크라이슬러 그룹)에서 흑자 브랜드로 손꼽을 정도로 판매량이 늘어났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부의 불평등이 심해진다는데, 페라리가 그 지표가 아닌가 싶다.
돈을 벌었으니 마음껏 해보자는 심보가 디자인에서 묻어난다. 표현은 더욱 과감해지고, 인상은 강렬해졌다. 그런데 또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 SF90 Stradale는 정반대로 디자인됐다. 피닌파리나가 62년 동안 페라리 DNA를 실패 없이 잘 연결해왔다. 지금 페라리는 피닌파리나 냄새도 나지 않는다. 꽤나 자유분방함이 넘친다. 솔직히 SF90 Stradale의 아키텍처는 포드 GT와 흡사하다. 그렇다고 폄훼할 순 없다. 페라리의 표현이 더 치밀하고 우아하다.
이제 확실히 이탈리아 명마의 말고삐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타야 할 SUV 디자인도 기대가 된다. 아쉽게도 람보르기니보다 한발 늦은 상태다. 이런 혼란한 시기의 페라리 디자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방향일 것이다